주요 유통사들이 오너 2·3세를 경영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주요 오너 경영인들이 점차 고령화되면서 승계에 가속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이들에게 신사업을 맡기며 경영 능력 시험에 나섰다. 관건은 능력을 얼마나 증명할 수 있느냐다.
오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영에 대한 준비나 검증 과정 없이 경영권을 덜컥 맡으면서 나타나는 ‘아마추어 경영 리스크’를 겪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한국의 유통기업들은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2024년 하반기 인사를 통해 승진한 후계 오너일가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범롯데가(家)다. 롯데그룹은 2024년 11월 29일 정기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롯데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된 오너 3세 신유열 전무의 승진 여부가 관건이었는데, 신 전무는 이번 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1986년생으로 아직 30대지만 이미 상무보와 상무를 빠르게 지나치고 지난해 인사에서 전무를 달았다.

일반적인 기업이라면 이제 갓 대리를 달았을 법한 나이지만 성과를 인정받았다. 롯데지주 미래 성장실장과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을 겸임한 신 부사장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신사업 및 신기술 기회 발굴과 글로벌 협업 프로젝트 추진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신 부사장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신사업과 글로벌사업을 진두지휘했다.
롯데그룹의 핵심 주력 사업인 유통과 화학 부문이 모두 부진한 상황에서 신 부사장의 역할론이 중요해진 상황이다. 미래성장실장 2년차를 맞아 바이오 위탁개발생산(CDMO) 등 신사업에서 성과를 창출해 그룹이 지속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방침이다.
범롯데가로 묶이는 농심 그룹도 세대교체에 나섰다. 하반기 인사를 내 농심은 신동원 농심 회장의 장남인 신상열 미래사업실장(상무)이 전무로 승진했다. 신상열 전무의 누나인 신수정 음료 마케팅팀 담당 책임도 상품마케팅실 상무로 승진했다.

1993년생인 신상열 전무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2019년 경영기획실사원으로 입사했다. 입사 2년만인 2021년 농심의 첫 20대 상무로 승진한 뒤 구매담당 상무와 미래사업실 상무 등을 거쳤다.
신수정 책임은 상무로 승진했다. 농심 쪽은 신상무가 “주스 브랜드 ‘웰치’를 담당하면서 매출 성장을 이뤄내 승진 대상에 올랐다”며 “상품마케팅실에서 글로벌 식품 기업과의 협업을 강화해 농심의 글로벌 사업 확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젊은 오너 일가가 경영 전면에 나서게 될 농심도 경영 상황이 좋지 않다. 농심의 2024년 3분기 연결기준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전년 동기 대비 0.6%와 32.5% 감소한 8504억원, 376억원으로 집계됐다.
국내 내수사업은 경기 둔화 영향으로 시장규모가 축소되며 특히 스낵(-6.6%),음료(-13.8%) 카테고리에서 감소 폭이 컸다. 중국 사업도 비슷한 이유로 문제다. 현지에서 소비 침체가 이어지면서 중국 법인 매출이 두자릿수 넘게 하락했다. 이번에 승진한 남매가 농심의 실적 개선을 주도해야 한다.
◇ GS리테일의 신임 대표에 ‘허서홍 부사장’ 내정

GS그룹도 오너 4세가 전면에 나서게 됐다. GS그룹은 2025년 정기임원 인사를 통해 GS리테일의 신임 대표에 허서홍 GS리테일 전사 경영전략SU장·부사장을 내정했다. 허 신임 대표는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의 장남이자 허태수 GS그룹 회장의 5촌 조카이며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의 사위다.
허서홍 부사장은 1977년생으로 대일외고와 서울대 서양사학,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 출신이다. 허 부사장은 2012년 GS에너지 LNG사업팀 부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2016년 GS에너지 전력·집단에너지사업부문장 상무, 2019년 GS에너지 경영지원본부장 전무, 2020년 GS미래사업팀장 전무, 2022년 GS미래사업팀장 부사장 등을 지냈다.

GS미래사업팀장으로서 GS그룹의 신성장 동력 발굴과 투자전략을 지휘해온 허 부사장은 GS리테일 경영전략SU에서 지원부서를 총괄했다. 경영전략SU는 GS리테일이 이번 인사에서 경영지원본부와 대외협력부문을 합쳐 신설한 조직이었는데, 여러 조직을 한데 모아 관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GS그룹은 허서홍 부사장이 폭 넓은 비즈니스 경험을 토대로 리테일 비즈니스의 지속적인 성장과 신성장동력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했다. GS그룹 오너가 4세 가운데 허세홍 GS칼텍스 대표·허윤홍 GS건설 대표에 이어 최고경영자(CEO)를 맡게 됐다.

다만 허서홍 신임 대표도 풀어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다. 2024년 3분기 연결기준 매출액이 처음 3조를 돌파한 3조547억원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수익성이 크게 악화했다.
영업이익은 24.1% 감소한 806억원을 기록했다. 당기순이익과 세전이익은 각각 631억원, 454억원 순손실을 기록하며 적자 전환했다. 편의점과 슈퍼, 홈쇼핑 등 주력 사업 성장성이 점차 떨어지는 만큼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다.
패션그룹형지의 오너 2세인 최준호 총괄 부회장이 자회사인 형지엘리트의 대표이사로 전격 선임된 것도 큰 화제가 됐다. 최 부회장은 패션그룹형지 창업자이자 아버지인 최병오 회장의 장남이다.

최 부회장은 앞서 2011년 패션그룹형지에 입사해 10년간 구매생산 부문에서 실무 역량을 다졌다. 2018년 그룹 통합구매생산 총괄본부장 담당, 2020년 공급 운영 부문 대표 역임 등 구매와 생산부터 재무부문 최고임원 역할까지 경험하며 실무능력을 쌓고 경영 감각을 익혔다.
이후 최 부회장은 ‘글로벌 형지’를 목표로 2021년 까스텔바작 대표이사로 경영 전면에 나서게 됐고 같은 해 12월 패션그룹형지 사장까지 겸하게 됐다. 이후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한 기반 마련과 신성장동력 발굴 등을 위해 다각도로 힘써왔다.
2023년 11월에는 23개 브랜드 전반을 총괄하는 패션그룹형지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최 부회장은 형지엘리트에서 스포츠 상품화 사업 매출을 크게 일으키며 실적 반전에 성공했다. 형지I&C, 까스텔바작 등 주요 계열사의 실적 부진 상황에서 그룹의 캐시카우로 떠오른 상황이다. 30대의 경영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경제사절단으로 잇따라 동행한 점도 성과로 꼽힌다.

◇ 3·4세 대표적 인물…전병우 삼양라운드스퀘어 본부장 주목
보직 변경은 없었지만 존재감이 더 뚜렷해지는 오너 3·4세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병우 삼양라운드스퀘어 전략기획본부장이다. 그는 2023년 10월 상무로 승진해 본격적인 3세 경영에 나섰다. 전 본부장은 삼양라운드스퀘어 전략총괄과 삼양식품 신사업본부장도 겸직하고 있다.
삼양라운드스퀘어의 핵심 계열사인 삼양식품은 현재 전례 없는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1∼3분기 누적 매출액은 작년 동기 대비 44% 증가한 1조2491억원으로 지난해 연간 매출액(1조 1929억원)을 뛰어넘었다.
누적 영업이익은 131% 늘어난 2569억원이었다. 영업이익은 이미 올해 상반기에 지난해 연간 실적을 넘어섰다. 3분기 해외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3% 늘어난 3428억원으로,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8%에 달했다.

삼양식품을 대표하는 메가히트작 ‘불닭볶음면’은 해외에서도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해외 판매 법인을 중심으로 한 현지 맞춤형 전략과 미국과 유럽 내 불닭 브랜드 인기가 매출로 이어져 분기 기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지난 5월에는 농심을 넘어서면서 30년 만에 라면 대장주가 바뀌기도 했다.
전병우 상무의 역할은 ‘넥스트 붉닭’의 아이템을 찾는 거다. 삼양식품이 지금과 같은 성장세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불닭을 넘어서는 새로운 히트작이 필요한 상황이다. 점 찍어둔 건 있다. 바로 ‘맵탱’이다. 맵탱은 지난해 8월 출시한 매운 국물라면이다. 전체적인 제품 콘셉트를 전 상무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아직까진 경쟁 브랜드 인지도와 영향력에 밀려 존재감이 미미한 상황이다.

삼양식품은 라면을 넘어 건강기능식품, 가정간편식 등 헬스케어 식품으로 영토를 확대하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전 상무의 역할론이 필수다. 하지만 전 상무를 바라보는 재계의 시선은 다소 엇갈린다.
한편에선 “젊고 촉망받는 경영인”이라 하는가 하면 다른 편에선 “경영 수업 기간 내내 별 특징이 안 보여 리더십에 의문이 있다”고도 한다. 일례로 삼양애니가 있다.
삼양애니는 2021년 말 불닭볶음면을 지식재산권(IP)으로 확대해 콘텐츠를 만들어 관련 매출을 내기 위해 전 상무가 주도해 만들어진 회사다. 설립 이후 삼양그룹의 신사업인 마케팅·이커머스 사업 등을 맡아왔는데,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전 상무의 너무 젊은 나이를 걸림돌로 지적하기도 한다. 1994년생의 전 상무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졸업 후 25세인 2019년 삼양식품 해외전략부문 부장으로 입사했다. 임원 승진 첫 해 그의 나이는 불과 29세. 당시 부친인 전인장 전 삼양식품 회장이 횡령 혐의로 경영에서 물러나면서 전 본부장이 예상보다 일찍 경영에 참여하게 됐지만, 경쟁사인 농심이나 오뚜기와 비교해도 승계 작업의 속도가 너무 빠른 게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 한화그룹 3세 김동선 부사장의 행보…미래 청사진 역할
이러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승계 작업은 착실하게 진행 중이다. 삼양라운드스퀘어는 현재 어머니 김정수 부회장이 3만5450주(32.0%)로 최대 주주다. 아들 전병우 상무는 2만6682주(24.2%)로 2대 주주다. 이어 아버지 전인장 전회장이 1만7650주(15.9%)로 뒤를 잇는다.
한화그룹 3세 김동선 부사장의 행보도 눈에 띈다. ‘미래비전총괄’이라는 직함을 바꿔 달으며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단순 신사업을 넘어 회사의 미래 청사진을 그리는 역할이다. 유통·호텔(서비스)를 넘어 외식·로봇·건설까지 영역을 빠르게 확장하는 모습이다.

오리온의 오너일가 3세인 담서원 상무의 존재감도 커지고 있다. 2021년 7월 오리온의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핵심 부서인 경영지원팀 수석부장으로 입사해 1년 5개월 만인 이듬해 12월 인사에서 경영관리담당 상무로 승진한 담 상무는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오리온이 해외법인을 통해 지분을 인수한 리가켐바이오의 사내이사로도 합류했다. 최근 2025년 정기 임원인사를 통해선 전무로 승진했다.
빙그레도 승계 준비를 위해 지배구조 개편에 나섰다. 최근 지주회사 ‘빙그레홀딩스(가칭)’와 사업회사 ‘빙그레(가칭)’로 인적분할하는 안건을 결의했다. 분할 비율은 각각 45.92%와 54.08%로 설정됐으며, 분할 시점은 2025년 5월 1일이다.

빙그레 측은 사업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이번 인적분할을 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분할 이후 빙그레홀딩스는 신규 사업 투자와 자회사 관리에 집중하며 그룹의 장기적 성장을 도모한다. 신설된 사업회사 빙그레는 유가공 제품 및 음·식료품 생산과 판매를 전담하며 독립적이고 효율적인 운영체제를 구축한다는 전략이다. 이렇듯 표면적인 이유는 사업 효율성 제고지만 오너 일가의 지분을 늘려 경영권을 강화하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다.
현재 빙그레 지분은 김호연 회장이 36.75%, 재단법인 김구 재단이 2.03%, 물류 계열사 제때가 1.99%, 재단법인 현담문고가 0.13%를 보유하고 있다. 아직 오너 3세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빙그레의 지분은 없으나, 제때는 다르다.
김 회장의 장남인 김동환 빙그레 사장을 비롯한 삼남매가 지분 100%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적분할 이후 기존 주주들은 지주회사와 사업회사 모두 동일한 비율로 주식을 보유한다. 즉 김 회장을 비롯해 제때 역시 빙그레홀딩스와 빙그레 양사의 주주에 오르는 셈이다. 이후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주식교환을 통해 지분이 대폭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별도의 돈을 들이지 않고 지배력을 끌어올려 경영 승계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셈이다.
현재 국내 유통 산업은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에 따른 탄핵 정국이 본격화되면서 소비 심리가 위축됐기 때문이다. 당장 내수 회복 조짐이 불투명한 가운데, 글로벌 성적표에 따라 유통 기업 전체 실적이 좌우되는 형국이다.

결국 “한국 유통 기업 미래는 글로벌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게 전문가 중론이다. 다만 외부 수출 환경도 녹록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 재선으로 보호무역 정책이 강화될 가능성이 커지면서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퍼펙트 스톰’이 몰려올 거란 암울한 전망까지 쏟아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너 2세와 3세 대부분이 해외 유학파라는 점이다. 글로벌 감각과 신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각 유통기업들은 후계자의 역량을 키워 향후 원활한 승계를 이루겠다는 구상이다.
이들의 전면 등장은 한국 유통업계의 세대교체를 한층 앞당기고 있다. 젊은 경영진들은 새로운 경영 전략을 도입하고, 기술 혁신과 온라인 중심의 비즈니스 전환을 이끌며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 또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빙그레의 경우, 김호연 빙그레 회장의 장남인 김동환 사장과 가족이 소유한 물류 계열사에 일감 몰아주기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했다.
김 사장은 술에 취해 경찰을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빙그레 경영진의 도덕성 문제까지 도마에 올랐다. 한국 소유경영의 폐해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자질 논란이 커질 경우, 불투명한 미래에 대처하는 게 어렵다.
따라서 오너 일가의 적극적인 경영 참여가 기업 가치 상승과 더불어 시장과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한국 유통업계는 오너 2세와 3세들의 경영 전면화를 통해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기업의 미래 전략과 책임경영 강화가 어떤 결실을 맺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