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를 둘러싼 지표가 심상찮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가가 안정을 찾을 거란 정부 예상과는 반대로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다가 2024년 상승률 전망에도 먹구름이 꼈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11월 물가 상승률은 3.3%였다. 전월보다 0.5%포인트 하락하긴 했는데, 이게 여전히 높은 수치라는 것이 문제였다.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7월 2%대에서 8월 3.4%로 훌쩍 뛰었다. 이어 9월(3.7%),10월(3.8%)에 이어 11월까지 4개월 연속 3%대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지난해 10월 물가 상승률이 상승한 건 정부 입장에선 꽤 뼈아픈 일이었다. 그간 정부는 한국의 물가가 다른 나라보다 빠른 안정세를 보인다며 정책 효과를 강조했고, 10월쯤은 물가가 안정될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는 국내 물가 상승률이 2%대로 내려간 지난해 6~7월만 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과 주요 20개국(G20) 중 2%대 물가 국가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소수에 불과하다”고 자찬했다. 그리고 10월 초엔 추경호 경제 부총리 겸 기획 재정부 장관(당시)이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국제유가와 농산물 가격 상승 등이 겹치며 두 달 연속 3%대를 기록했지만, 계절적 요인이 완화되는 10월부터는 다시 소비자 물가가 안정화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발언 이후 발표된 물가상승률이 다시 치솟으면서 정부의‘물가 안정론’은 무색해졌다. 더 큰 문제는 2024년에도 물가 상승률 안정화를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정부의 물가 목표치 2%를 언제 달성하느냐가 문제인데, 당장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커지고 있다.
2023년만 해도 1~11월 누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7%를 기록했다. 12월까지 포함하면 3.6%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는 정부가 2023년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로 제시한 3.3%를 아득하게 웃도는 수치다.
한국은행은 2023년 11월 30일 발표한 수정 경제전망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3.5%에서 3.6%로, 2024년 전망치를 기존 2.4%에서 2.6%로 각각 상향 조정했다. 물가둔화 속도가 예상보다 더 느려짐에 따라 2024년 말까지 물가 목표(2%)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언급했다.
이어 장기적으로 물가 상승 압력이 구조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 정보를 활용하는 전문가의 기대인플레이션도 최근 3.0%까지 상승했는데 이는 물가 상승률 둔화에 소요되는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다.
글로벌 무역체제가 분절화되고 기후변화로 친환경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대외여건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누적된 비용 상승요인으로 인한 2차 파급효과, 국제유가·환율변동, 공공요금 등과 관련한 정부 정책, 연말·연초 가격조정 집중 가능성 등 관련 리스크 요인을 주의 깊게 살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의 2024년 물가 전망도 낙관적이지 않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역시 2024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2.6%로 전망했다. 2023년 8월 수정 전망(2.5%) 때보다 0.1%포인트 올려 잡은 것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 역시 2024년 한국 물가 상승률을 종전보다 0.3%포인트 상향한 2.5%로 수정했다. 상향 조정한 이유로 ADB는 “글로벌 에너지 및 식품가격 상승과 함께 근원 물가 상승 압력이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경제전망 보고서를 통해 2024년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2.6%에서 2.7%로 0.1% 포인트 높였다.

◇ 물가잡기 총력…인플레이션 감내하는 유통업계
목표 수준인 2%대에 도달하려면 갈 길이 먼 인플레이션은 한국 유통산업을 ‘역대급 비상사태’로 몰아넣었다. 소비자물가와 유통업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서민 실생활과 밀접한 제품을 팔고 있기 때문에 물가 인상에 따른 직간접적 여파가 비교적 빠르게 시장에 반영된다. 특히 가공식품과 외식 물가상승률이 유독 두드러지면서 서민들의 주름살이 늘었다.
2023년 먹거리 물가는 연초부터 높은 수준을 보여 서민들의 장바구니와 외식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기업들이 원부자재 값 인상에 소비자 가격을 상향 조정한 탓도 있었다. 이에 정부는 서민 부담을 가중하는 식품 물가를 잡기 위해 총력 대응에 나섰다.
생활물가 밀착 관리에 들어갔다. 다만 방법론이 문제였다. 기업의 팔을 비트는 방법으로 판매가격을 인하하게끔 유도했기 때문이다. 특히 2023년 정부의 간섭은 서민층이 즐겨 먹는 라면 산업에 집중됐다.
라면 업계는 지난 2023년 6월부터 드물게 제품 릴레이 가격 인하에 나섰는데, 이는 추경호 전 부총리 겸 기획 재정부 장관의 ‘권고’ 이후에 발표가 나왔다. 추 부총리는 당시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지난해(2022년) 9~10월에 라면 판매 기업들이 가격을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 내렸다. 기업들이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라면의 주원료인 밀 가격이 지금은 크게 내려갔으니, 거기에 맞춰 가격도 낮추라는 압박이다. 실제로 밀과 팜유, 옥수수 등의 국제 가격은 고점을 찍은 2022년 5월 대비 절반 수준으로 떨어져있던 상황이었다.

추 전 부총리는 정부의 시장 개입 비판을 의식했는지, 시민단체의 조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정부가 하나하나 원가를 조사하고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소비자단체가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대한민국 경제수장의 경고가 떨어지자, 국내 라면 업계 1위 농심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자사 대표상품인 신라면과 새우깡의 판매가격을 각각 4.5%, 6.9% 낮췄다. 소매점 기준 1000원짜리 신라면 한 봉지는 50원, 1500원인 새우깡은 100원 정도 내렸다.
삼양식품 역시 삼양라면과 짜짜로니, 맛있는라면, 열무비빔면 등 12개 대표 제품의 가격을 평균 4.7% 인하했다. 농심과 삼양식품이 라면 가격을 인하한 건 2010년 이후 1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뚜기도 가격 인하 대열에 동참했다. 라면류 15개 제품의 가격을 평균 5% 내렸다. 팔도도 11개 제품의 가격을 5.1% 인하했다. 이밖에도 밀가루를 핵심 원재료로 사용하는 롯데웰푸드, 해태제과, SPC 등 제과·제빵업계도 주요 품목의 판매가격을 5~10%까지 낮췄다.
라면 이전에는 소주와 맥주가 압박에 못 이겼다. 이때도 추 전 부총리가 나섰다. 추경호 전 부총리는 2023년 2월 ‘소주 1병 6000원 시대가 열릴 것’이란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오자 “소주 등 국민이 정말 가까이 즐기는 그런 품목에 대해서는 업계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기재부는 인상 요인을 집중 점검했고, 주무 관청인 국세청은 주류업체들과 비공개 간담회를 열어 압박 강도를 높였다. 당초 원부자재 가격, 물류비, 제조경비 등 전방위적으로 큰 폭의 원가 상승 요인이 발생해 가격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렸던 하이트진로, 롯데칠성음료, 오비 맥주 등 주류업계는 인상 계획을 전면 보류했다가, 2023년 말쯤 돼서야 다시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다.
◇ 2024년에도 정부의 생활물가 관리 계속 이어질 듯
식품업계에선 가격을 올리지 않는 대신 양과 품질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이 이슈로 떠올랐다.정부의 생활물가 관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라면·빵·과자·커피·아이스크림·설탕·우유 7개 품목 가격을 TF를 꾸려서 집중 관리하는 중이다. 2024년 들어서도 생활물가는 갈수록 치솟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들어오는 돈이 뻔한 국민들에겐 생활물가 상승은 허리띠를 더 졸라매게 하고 있다. 지출이 늘어나는 만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얇은 서민의 지갑이 더 얇아지고 있는 것.
최근 들어선 식품업계의 ‘슈링크플레이션’을 겨냥하고 나섰다. 슈링크플레이션이란 제품 가격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품의 양과 품질을 줄이는 걸 뜻하는 경제 용어다.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부터 업체들이 원가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내용물을 줄이면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물가 현장 점검에 나섰던 추경호 전 부총리는 유통업체들의 슈링크플레이션 행위를 꼬집으며 “관련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장관, 김병환 기획재정부 1차관이 연이어 공개적으로 “업체들의 꼼수 가격 인상 행태를 점검하겠다”고 공언했다.

공정위와 소비자원, 관계부처(기재부·농식품부·산업부·해수부·식약처 등), 소비자단체도 지난해 11월 22일 슈링크플레이션 관련 실태 조사 진행 현황을 공유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이 간담회에서 이들은 73개 품목(209개 가공식품)의 슈링크플레이션 여부를 조사해 그 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다.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품목은 한국소비자원 홈페이지에 신고센터를 설치해 대국민 제보를 받고 있다.
정부는 슈링크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대책도 발표했다. 핵심은 사업자가 용량이나 성분 등을 변경할 경우 소비자들에게 정보를 정확하게 공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문가·소비자단체를 중심으로 기업이 소비자에게 제품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가운데 정부가 본격적인 실태조사에 착수하면서 유통 기업들은 꼼수로 가격을 인상하는 악덕 기업이란 이미지가 쌓이는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기업들은 실적을 생각하면 가격을 인상해야 하지만 정부가 앞장서 가격 동결을 요구하다 보니 제품의 양을 줄이는 우회적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정부가 슈링크플레이션을 잡겠다고 직접 나서며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정부의 가격 인하 압박은 올해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식품업계가 일제히 호실적을 기록하고 있어서다. ‘국내 라면 3사’로 묶이는 농심과 오뚜기, 삼양은 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대폭 증가했다.
농심은 2023년 3분기 매출 8599억원, 영업이익 557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5.3%, 103.9% 증가한 수치다. 업계 2위인 오뚜기는 같은 기간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0.6% 증가한 9087억원,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87.6% 성장한 830억원이었다.
삼양 역시 매출은 지난해 3분기 기준 전년 동기 대비 58.5% 증가한 3352억원으로 분기 최대 매출을 경신했다. 분기 매출이 3000억원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3분기 영업이익은 무려 124.7% 급증한 434억원으로 고성장세를 이어갔다.
라면뿐만 아니라 식품업계 전반적으로 좋았다. 빙그레는 2023년 3분기 영업이익이 654억원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153.9% 증가했다. 매일유업도 63.7% 늘었다. 오리온의 영업이익도 전년 동기 대비 15.6% 증가했다. 풀무원, 대상도 50% 이상 실적이 개선됐다.
이같은 호실적에 힘입어 식품업계에선 2023년 ‘3조 클럽’(매출 기준) 가입 기업이 10개가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22년엔 3조 클럽의 개수가 8개였는데, 롯데칠성음료와 CJ프레시웨이가 가뿐히 연 매출 3조원을 돌파하면서 3조 클럽에 가입할 것으로 보인다. 오리온과 삼성웰스토리도 강력한 후보군으로 꼽힌다.
다만 호실적을 거둔 기업들 사이에서도 인플레이션 압박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부분의 업종의 기업들이 경기 침체로 실적 악화를 겪고 있는데, 식품산업은 실적이 좋은 만큼 제품 가격을 낮출 여력도 충분하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정부 눈치 보는 식품업계, 가격 올리고 싶어도 못 올려
식품 기업들은 이런 분위기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가격 인상 요소는 여전히 많은데 그간 정부가 업계에 가격 인상을 자제해달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호실적 역시 항변할 거리가 있다. 내수시장에서 많이 팔아서 실적이 개선된 게 아니라, 해외 실적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엔데믹 이후부터 국내 시장 영업 환경이 원재료 및 인건비, 전기요금 상승 등으로 악화하자 관련 업체들은 해외 시장에 더 공을 들였고, 그 효과가 올해부터 가시화하고 있다는 게 업체들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농심의 경우, 농심은 3분기 영업이익의 50% 이상을 해외에서 올렸다고 설명했다.
미국법인과 중국법인을 비롯한 해외법인의 영업이익이 약 200억원, 여기에 국내법인의 수출 이익을 합산하면 약 250억원가량을 해외에서 벌었다는 설명이다. 삼양식품 역시 해외 매출은 239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8.3% 증가했고 분기 사상 처음으로 2000억원을 돌파했다.
실제로 관세청 무역통계에 따르면 2023년 1~10월 라면 수출액은 7억8525만 달러로 지난해 동기 대비 24.7% 늘었다. 라면 수출액은 10개월 만에 기존 연간 최대치인 2022년의 7억6541만 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식품업계의 한 관계자는 “보통 같은 제품도 국내보다 해외 가격이 높아 매출 대비 영업이익이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호실적엔 ‘기저효과’ 착시도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2022년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국제 곡물가가 요동치면서 수익성이 악화했다”며 “2023년엔 이런 기저 효과가 반영돼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개선된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2023년의 실적은 좋았지만, 2024년의 실적 전망은 불확실하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 될수록 관련 식품업계 손실도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불황형 소비 트렌드, 식품 소비 채널의 변화 등이 복합적 악재로 꼽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제품 가격 인하 압박에 시달리면 기업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다. 이윤이 줄어도 오롯이 기업만 감당해야 하는 게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정부의 통제가 물가의 유동성을 고려하지 않은 행위라는 지적도 팽배하다. 원가가 오르는데도 제품 가격을 올리지 않을 경우 결국 나중에 더 큰 폭의 가격 인상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물가상승 요인이 발생할 때마다 매번 억제정책을 펴는 건 무리가 있으며 현 정부가 표방하는 시장경제 원리에도 맞지 않다”면서 “많은 기업은 이제 가격 책정에 수학적인 알고리즘을 사용하고 있는데, 정부가 실시간으로 변하는 공급가격 중에 어떤 것은 비싸고, 어떤 것은 싸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